강대진
너무나 필연적인 오역에 대한 성찰

지난 8월말에 오역(誤譯)들을 지적하는 책을 한 권 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가 무슨 번역전문가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나라 번역계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해달라는 주문들을 한다. 이럴 때의 내 심정은, 지금은 돌아가신 중세라틴문헌학자 이득수 선생님(전 시에나 대학 교수)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뒷방에서 회계장부의 수입지출을 맞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연단에 불려나와 세계 경제에 대해 논하라는 주문을 받은 것과 같다."  나는 단지 내 전공 분야와 관련된 것들을 언급했을 뿐인데, 전반적인 오역의 문제라니!
하지만 뭔가 일을 시작하자면 계기가 필요하고, 내가 책 낸 것이 더러 그런 계기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니 마냥 사양할 수도 없다. 하여, 그냥 책 읽기 좋아하고 번역이 잘 되었는지 조금 유심히 보는 사람 중 하나로서 글을 쓰고자 하니, 이 글에서 엄청난 진단과 대책이 나오기를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주제넘지만 내가 보기에 좋은 번역이 나오려면 필요한 것이 읽는 능력, 쓰는 능력, 사실지식 그리고 마지막이 외국어 실력이다. 내가 외국어를 마지막에 꼽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외국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외국어는 기본이니 사실 여기서 꼽는 것이 좀 우스워서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읽는 능력'
내가 제일 앞자리에 놓고 싶은 것은 읽는 능력, 즉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외국어 문장을 앞에 두고, 일단 기본적인 문장구조가 파악되고 나면, 그 다음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문제되고, 그 이해에 따라 어떤 어휘들이 선택될지가 결정된다. 여기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선택된 번역어들이 모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게 되고, 완성된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된다.
반면에 독자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번역문들은 대개 원래의 외국어 단어가 가진 여러 뜻 중에서 잘못된 것을 선택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실 한 단어 뜻만 잘못 선택해도 이상해지는데, 더 나쁜 경우는 한 문장 안에 잘못 선택된 어휘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원래 평번하던 문장이 심오하게 되는 일도 있다.
내 생각에, 책을 좋아하는 대학생 정도의 독자가 읽어서 무슨 말인지 모를 '심오한' 문장이면 그것은 잘못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런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아마도 번역자의 절대 독서량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 이 절대 독서량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한 분야의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분야 책들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잘못된 내용파악, 잘못된 어휘선택으로 독자들을 '심오한' 세계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올바른 언어감각으로 표현하는 '쓰기 능력'
'대책'(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두 번째로 꼽은 쓰기 능력에 대해 얘기하자. 보통 글쓰기 능력이라 하면, 거기엔 내용 구상, 전체적인 틀 짜기, 문장 만들기, 문장들의 논리적인 연결 등이 포함될 텐데, 번역에 관한 한 이런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원 저자가 다 해놓았기 때문이다. 역자가 할 일은 번역문 문장을 제대로 만드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쓰기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은 번역자의 언어감각이 보통 사람들과 좀 다른 경우가 이따금 눈에 띄어서다. 문장의 원래 뜻은 제대로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엉뚱한 느낌의 말로 표현하니 전체적으로 이상한 문장이 되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런 일들은 번역자가 한자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경우에 잘 일어난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까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글을 써서 제출하고 누군가에게 교정을 받은 기억이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를 기준으로 보자면, 선생님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지침도 없이 그저 '글쓰기' 숙제를 내주고 안 해온 학생들에게 벌을 준 것만 기억난다. 대학에서도 과제를 내서 성적이 잘 나오면 내가 잘 썼나보다, 성적이 안 좋으면 못 썼나보다,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니 한 학생이 잘못된 언어감각을 갖고 있어도 교정받을 길이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학생이 외국어를 잘해서 번역가가 되면 그 잘못된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글쓰기 교육의 피해를 독자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도 있지만, 이런 글에서 만큼은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다.

폭 넓은 독서로 지식을 탐구하는 '사실지식'
다음으로 꼽은 사실지식의 문제. 이것은 사실은 교양교육의 문제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체제에서는 너무 폭 좁은 '전문가'만을 길러내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는 뛰어난 사람도 그 밖으로 나가면 평범한 사람들과 별 다를바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런 사정은 번역을 전문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번역을 맡긴다면 그것은 대개 그 사람이 특정 외국어를 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번역해야 하는 책에는 온갖 주제가 다 나오니 외국어 실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물론 자기가 잘 아는 분야의 책만 골라서 한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일을 골라 할 수 있는 팔자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국 자기 '전공'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각자 알아서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 것밖에 없는데, 이 일이 또 만만치 않다.
현재 우리나라 입시제도에서 중·고등학생이 학교 수업과 관련 없는 독서를 거의 할 수 없는 사정은 다 아실 테고, 대학생들은 왜 또 그리 바쁜가? 좋은 책들의 목록을 정해놓고 그것들을 강제로라도 읽히자는 분들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지식을 찾아가도록 교육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사전을 뒤져가며 제2외국어와 친해지기
마지막으로 다시 외국어 문제. 우리나라 많은 역자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보통 한 두 가지 외국어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간에 자신이 모르는 외국어가 나오면 거기서 길을 잃게 된다. 내 분야와 관련해서 얘기하자면, 아주 간단한 라틴어 경구인데 잘못 옮겨진 것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다른 언어를 하나 정도 더 알고 있으면, 번역 원문이 무슨 뜻인지 불분명할 때 다른 언어 번역판을 참고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다. 사실 여러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번역에 종사하려는 사람은 제2외국어 하나 정도는 사전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읽을 정도까지는 만들어 두어야 하고, 다른 주요 외국어들도 초급문법 정도는 공부해 두어야 한다.

다음 세대 번역자들의 노력만이 대책
이상에서 대체로 좋은 번역자가 갖춰야 하는 '덕목'들과 우리가 그것을 얻는 데 방해되는 것은 무엇인지 언급했다. 이쯤에서 대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실은 대책이 없다. 모든 것이 교육제도, 더 정확히는 입시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은 비용의 문제 또는 국가자원 사용의 우선순위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외적 상황이 그대로라면, 대책이라고는 그저 개인의 노력밖에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열심히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래의 번역자들을 위한 지침일 뿐, 이미 번역을 하고 있는 바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래도 이런 이들을 위해 도움이 될 일이 하나 있긴 한데, 사실 지식에서만이라도 도움을 줄 지침서들이 분야별로 나오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번역자들은 어려서부터 남 달리 읽기·쓰기와 외국어를 좋아하던 분들이니, 이 정도의 도움이면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앞에 말한 책에서 내가 하려 했던 일도 그것인데, 고생도 되고 남의 욕먹기 좋은 일이라 누가 그런 일을 또 하랴 싶다.
출판사들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감수받는 것을 관례로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걸려 있어서 현실적으로 잘 될지 그것도 의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번역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아예 가망 없는 것으로 보는 듯해서 좀 미안한데, 결국 내가 충고하고 격려할 대상은 아직 성장중인 다음 세대뿐이다. 특히 독학자들을 포함해서 아직 공부하는 대학생 정도의 세대에게 폭 넓게 많이 읽고 자주 쓰라고 당부하는 수밖에 없다, 세상이 점점 바쁘게 돌아가니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우리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강대진 (<잔혹한 책읽기> 저자)


* '사람과 책' 11월 호에 실렸던 글인데, 올리기 귀찮아서 매번 미루다 이제야 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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